2000년 전 고대인 DNA, 머릿니가 보존하고 있었다

남미 고대인의 이주 경로와 생활환경 알려줘

유승민 승인 2022.01.05 11:09 의견 0
머릿니의 생물학적 사진

영화 ‘쥬라기공원’에서 복제 연구자들이 공룡의 피를 빨다가 송진에 갇힌 모기에서 공룡 DNA를 추출했다. 마치 영화처럼 과학자들이 미라에 남은 머릿니에서 2000년 전 살았던 고대인의 DNA를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 앞으로 고대인의 유골과 치아를 훼손하지 않고 옷이나 머리카락에 남은 머릿니로 고대인의 생활과 이주 과정을 밝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영국 레딩대의 알레한드로 페로티 교수 연구진은 “남미에서 발굴된 미라의 머리카락에 붙은 서캐에서 고대인의 DNA를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고 지난 28일 국제 학술지 ‘분자생물학과 진화’에 발표했다.

서캐는 머릿니의 알이다. 이는 알을 낳고 접착물질을 분비해 사람 머리카락에 붙인다. 이때 두피의 피부세포가 접착물질에 붙어 그대로 남을 수 있다. 송진이 굳은 호박(琥珀)에 갇힌 모기에게 공룡의 피가 남은 것과 마찬가지다.

서캐를 머리카락에 붙인 접착물질에서 고대인의 DNA가 발견됐다.(서캐. 정성규 제공)

유골 훼손하지 않고 DNA 추출 가능

영국과 아르헨티나, 덴마크 과학자들은 남미에서 발굴된 1500~2000년 전 미라 8구에서 머리카락에 남은 서캐를 찾았다. 연구진은 서캐와 머리카락 사이에 단단하게 굳은 접착물질에서 고대인의 세포핵 DNA와 에너지 생산기관인 미토콘드리아의 DNA를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

논문에 따르면 머릿니의 접착물질에서 추출한 고대인의 DNA는 치아에서 추출한 것과 같은 수준이었으며, 두개골에서 나온 것보다 2배는 많았다. 또 뼈나 치아는 오랜 시간이 지나면 화학적으로 변성될 수 있지만 서캐의 접착물질은 DNA의 화학적 손상을 방지할 수 있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무엇보다 서캐를 이용하면 고대인 DNA 추출 과정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종교적 갈등을 미연에 예방할 수 있다. 페로티 교수는 “서캐에서 머릿니의 숙주인 사람의 유전자를 찾아낼 수 있으면 고대인의 유골과 치아를 훼손하지 않아 그 후손인 토착민과의 갈등을 방지할 수 있다”고 밝혔다.

안데스 산맥 동쪽의 아르헨티나 산후안 지역에서 발굴된 2000년 전 미라. 서캐에서 나온 DNA를 통해 아마존강 북서부에서 살던 사람들이 산후안 일대로 이주한 것으로 밝혀졌다. /아르헨티나 국립 산후안대

고대인의 생활 환경과 이주경로 밝혀

연구진은 서캐에서 추출한 DNA를 통해 아르헨티나 중서부 안데스 산맥 동쪽의 산후안에 사는 사람들이 원래 2000년 전 지금의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 남쪽에 해당하는 아마존강 북서부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는 이전 고고학 유적을 통해 제시된 이론과 일치한다.

또 서캐에서 메르켈세포 폴리마바이러스의 DNA도 찾아냈다. 이 바이러스는 200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처음 발견됐다. 건강한 사람의 피부에도 있지만 면역력이 약한 노인이나 에이즈 환자, 장기이식 환자에서는 피부암을 일으킬 수 있다. 이번 연구를 통해 메르켈세포 폴리마바이러스가 머릿니를 통해 전파될 가능성이 제시됐다.

연구진은 머릿니를 통해 고대인이 살았던 환경도 엿볼 수 있었다고 밝혔다. 서캐가 머리카락에서 두피 가까운 곳에 촘촘하게 붙어있다면 고대인이 사망할 당시 기온이 매우 낮았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온도가 낮으면 머릿니가 사람 체온으로 서캐를 보호하려고 두피 가까이 알을 낳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제노메딕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